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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전 국무총리 별세

by 다니아요 202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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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전 국무총리 별세

안녕하세요 최근 대통령 후보 경선이 거대양당이 치열한 와중에 금일 포스트 JP로 불리던 충청권의 대표 주자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별세한 사망 이유는 몇 해전부터 지병이었던 혈액암 때문인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이와군 전 국무총리께 애도의 말씀을 전하며 오늘은 이완구 전 국무총리 별세 소식과 함께 전 총리를 기억하는 포스팅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완구 전 총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 원내 사령탑에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총리에 오르며 승승장구, 충청권을 대표할 대권주자로 거론되기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 이완구 전 총리의 생애와 사망 원인을 더욱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국무총리 이완구, 충청통으로 공직생활 시작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에서 태어나 상경해 양정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한 후,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충남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경찰로 자리를 옮겨 31세의 나이로 최연소 경찰서장에 올라 홍성에 초임발령을 받았습니다. 39세에는 최연소 경무관이 된 후에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서 파견 근무, 1986~1989년도엔 약 3년간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근무하였으며, 40대 초에 이미 2급 공무원 상당인 치안감까지 올라 충북지방경찰청장, 충남지방경찰청장으로 지내며 충청통으로 공직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경력덕분에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활발했는데 그 러브콜을 통해 경찰생활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러브콜의 화답처는 국민의힘의 전신 민자당(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을 하였고 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충남 청양-홍성군 선거구로 출마, 조부영 자유민주연합 후보를 꺾고 당선 국회에 입성하며 본격적인 정치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국무총리 이완구, 정치일대기

이완구 국무총리가 정치에 입문한 시기만 하더라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있었습니다. 당시 충청도 역시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세가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컸음에도, 이완구 국무총리는 충남서 유일한 신한국장 당선자다보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완구 국무총리는 1998년 정권교체로 공동여당이 된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고 대변인을 맡았고 그 덕분에 2000년 재선에 성공한 후 원내대표를 역임하였습니다.

 

하지만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선거구가 통폐함되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였으며 이후 2006년 귀국하여 지방선거에 출마 충남지사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데 반발해 "충남도민의 소망을 지켜내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충남지사직에서 전격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단력을 바탕으로 충청권에서 그 어떤 정치인보다 훌륭하게 입지를 다짐과 동시에 이 덕분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도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원을 발판 삼아 '뚝심'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이완구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형사 사건에 휘말리는 아픔을 겪으며 좌절해야 했습니다.

해서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국회 입성을 다시 노렸으나 그해 초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으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치료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상황이 호전되어 2013년 부여, 청양 재보권 선거에 득표율 80%에 가까운 몰표를 받아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였고 이듬해인 2014년 5월에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어 중앙 정치무대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정치적인 풍파 및 고난을 많이 겪은 이완구 전 총리는 분류상 '친박'계 인물로 분류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이명박 정권에서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충남도당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힘을 보탰으며 그에 따른 박 전 대통령의 신임도 높았습니다.



국무총리 이완구, 정계 은퇴

이렇듯 박 전 대통령의 높은 신임 덕분에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2015년에 박근혜 정부 국무총리로 지명 되었으나 취임 전부터 '언론 외압', '병역 회피', '부동산 투기' 등 다양한 의혹에 휩싸이며 사퇴 위기를 맞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적극 해명함과 동시에 사과하면서 그해 2월 17일 우여곡절 끝에 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하여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정치권 금품 제공 메모'에 이완구 전 국무총리 이름이 있었고, 성 전 회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3000만 원을 건넸다는 주장을 남겼습니다.

이에 인사청문회에서 적극 해명했음에도 여론은 악화하고 정치권에서는 사퇴 압박이 커지며 격국 재임하진 63일만에 사의를 표명하고 70일만에 불명예 퇴진을 하게됩니다.

 

끝날거 같지 않은 정치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정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으며 명예회복을 하게됩니다. 당초,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16년 1월 1심에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같은 해 9월 2심에서 무죄로 결론 났고 최종심인 대법원도 2017년 12월 원심을 확정하여. 무죄로 결론지었습니다.

정치복귀가 점쳐지는 상황이었고 본적인 자유한국당에서도 적극적 러브콜을 받았으나 후에 출마를 고사하며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는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선에서 그저 정치 원로로의 따끔한 조언을 하는 역할만을 맡으며 "세대교체와 함께 인재 충원의 기회를 열어주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국무총리 이완구, 다발성 골수증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충청의 거두 JP, 김종필 총재가 유난히 아끼는 인사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평을 빌리면 "번개가 치고 나면 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아마 어떤 난관에서도 극복했던 그의 모습을 본 후 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이명박 - 박근혜 정부를 통틀어 유일한 '정치인 총리'였지만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취임 70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최단 총리'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성품은 어느 정치인 못지않게 화끈한 결단력과 호탕한 모습으로 많은 세력을 확보했었지만 2012년에 시작된 '다발성 골수종'에 발목을 잡힘에 따라 2016년 재발 그리고 최근까지도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지며 오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요즘 시대에 어찌보면 71세라는 조금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되어 안타까움은 더 커집니다.

이완구의 가족으로는 와이프 부인 이백연씨와 두 아들을 자녀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상으로 오늘 별세하신 이완구 전 국무총리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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